실제 1212사태 수사 내용 (전두환과 정승화)
12·12 군사반란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과 하나회가 일으킨 쿠데타라고 인식이 되었지만,
실제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한쪽 방향 관점에서 편향되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 였던 '김용삼'은 1212사태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검찰 수사 내용을 받아서 조사했다고 합니다.
1212사태 검찰 수사 기록만 무려 14만 페이지나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걸 일일히 살펴보면서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사건을 재구성 했다고 설명하였죠.
해당 본문은 아래의 기록을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
- 검찰 수사기록
- 전두환 회고록 1
- 이순자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이것이 100% 사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부부싸움도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점의 차이가 있듯이 1212사태 역시도 마찬가지 일 거라고 봅니다.
서로 자신은 정당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삼자대면을 해보면 진짜 진실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이 주장하는 1212사태의 관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전두환 회고록은 판매 금지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일부 문장 때문에 금지를 당했고 해당 내용을 삭제하여 재발행 되었습니다.
즉, 전두환 회고록 1212사태에 대해서 법원은 문제없다고 보았습니다.
12·12사태 역사적 배경
먼저 12.12사태가 발생하기 전 박정희가 죽었던 10·26 사건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아래 내용은 10·26 사건 배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김재규, 정승화 |
제 3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정승화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추천을 한 사람도 김재규 였습니다.
10·26 사건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김재규는 박정희를 총을 쏴서 죽였고 박정희를 경호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이게 됩니다.
수 십 발의 총성이 울렸죠.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 범죄 현장 재연 |
박정희가 죽은 상황에서 정승화는 바로 옆 건물에 있었습니다.
박정희 사망 당시, 정승화(본관) 김재규(나동) 위치 |
정승화는 수 십 발의 총성이 울렸기 때문에 '궁정동 안가' 요원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였죠.
그러나 상식적으로 바로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렸는데 이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건 수상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정승화는 6.25전쟁, 베트남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군인입니다.
정승화 군 경력 |
상식적으로 실제 전쟁터에서 무수히 많은 총소리를 들었던 사람인데 금방 상황 파악이 될 수 있는 사람이죠.
그러나 1994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정승화는 총성에 대하여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청와대 외곽 초소에서 오인으로 인한 위협 사격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구)청와대 건물과 궁정동 안전가옥 간에 거리는 약 400m 였습니다.
청와대 구 건물과 궁정동 안가(現 무궁화동산) 거리 |
그것도 수 십 발의 총성이었으므로 오인 사격으로 인지하는 건 더욱 말이 안됩니다.
이후 온몸에 피범벅이 된 김재규는 정승화를 찾아갔고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긴박한 상황에 정승화와 김재규는 같은 차에 탔고,
10월 27일 새벽 1시,
정승화는 육군본부에 지하 벙커(현 용산 전쟁기념관)로 갑니다.
드라마, 미디어에서는 김재규가 차안에서 중앙정보부로 갈지, 육군본부로 갈지 고민했다고 했는데요.
실제로는 고민 없이 바로 육군본부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김재규의 측근인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어야 군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오일랑 당시 중령 |
그렇지만 김재규는 "여기 중정 지하문이네~ 길 잘못왔구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하죠.
즉, 김재규는 처음부터 중앙정보부에 갈 생각이 없었고 육군본부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재규, 정승화가 차 안에서 대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재규 정승화 차안에서 대화 기록
김재규: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승화: 외부 소행입니까. 내부 소행입니까?
김재규: 나도 모르겠습니다.
정승화: 내부 일이겠지요?
김재규: 김일성이 알면 큰일입니다.
보안을 유지하고 신속히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계엄 선포 후 어떤 부대가 동원 가능합니까?
정승화: 계엄이 선포되면 20사단, 30사단, 9공수 여단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김재규: 앞으로 총장께서는 계엄사령관으로 중대한 일을 맡게 되셨습니다.
총장의 어깨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김재규는 자신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는데,
마치 자신은 범죄자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으며,
자신이 대통령인 것 마냥 정승화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계엄령에 대한 권한은 박정희가 죽었기 때문에,
총리인 최규하가 계엄권한을 갖고 있는데 말이죠.
10월 27일 새벽, 최규하 총리는 박정희의 시신을 확인 후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10월 28일, 최규하는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여 박정희 사망 사건 수사를 하도록 지시합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는 이 때, 최규하는 정승화가 김재규와 같이 있던 사실을 몰랐습니다.
만약에 최규하가 정승화가 김재규와 사건 당시 같이 있던 사실을 알았다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았을겁니다.
12·12 사태 배경
12월 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유신헌법 간선 투표로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이 됩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10.26 사건 당시 목격자의 진술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는 것들은 모두 지워버립니다.
정승화는 지속적으로 수상한 행동들을 많이 보였습니다.
전두환 뿐만 아니라 다른 군인들도 정승화의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죠.
전두환 합수부장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던 중,
김재규가 정승화와 함께 동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 정승화는 왜 김재규와 같이 있었는가?
-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에서 무엇을 했는가?
- 왜 김재규는 체포되었지만 정승화는 아무런 조사를 받지 않는 건가?
전두환은 정승화에 대하여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상황이죠.
다른 인물들은 구속되었고 재판까지 받았는데, 정승화 그 인물만 아무런 조사도 안 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수상한 행동들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군계엄법을 집행할 권한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은 정승화를 수사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을 구속 영장 청구를 해야하는데 정승화 자신한테 칼을 겨누는 것을 승인해줄리가 없으니까요.
비유하자면 검찰이 A판사를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하는데 그걸 A판사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딱 한가지, 정승화를 구속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요.
제 4 공화국 '군회의법 제 242조'에 의거하여
긴급한 상황인 경우, 선 구속 후 영장 발부가 가능했습니다.
대신 구속 후 48시간 이내로 영장을 받아야 했죠.
만약 2일 이내 영장을 받지 못하면 다시 풀어줘야 합니다.
2일이 지나도 영장 없이 구속을 한다면 불법 행위가 됩니다.
전두환은 이 법문으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구속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12월 12일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 후 30분 뒤 정승화를 체포하기로 계획합니다.
즉, 전두환의 정승화 구속 계획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전두환의 정승화 체포 계획
- 전두환은 박정희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 당시 현장에 있던 정승화를 조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낌
- 그러나 정승화는 계엄법을 집행하는 계엄사령관이므로 마땅히 구속할 방법이 없었음
- 전두환은 '긴급구속' 법에 의거하여 선 구속 후 영장 발부 계획을 세움
-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 후 허가를 받으면 30분 후 정승화를 체포 할 것을 계획을 세움
- 이렇게 빨리 구속을 하려는 이유는 구속 시간이 2일로 한정되어 있었고 영장 발부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최대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임
그러나 이 계획은 완전히 망가지게 됩니다.
전두환, 최규하 |
전두환은 대통령 보고 없이도 피의자 연행에 대해서는 합수부장으로서 정승화 체포가 가능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전두환의 생각은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최규하 였고,
계엄령이 선포 된 불안한 정국이었기 때문에,
도의적, 국무적으로 대통령한테 보고 후 체포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행동으로 인하여,
나중에 전두환의 1212사태가 벌어진 원인이 되어버립니다.
12월 11일.
12·12사태가 일어나기 하루 전,
전두환은 밤에 가족들을 모아서 유언을 남깁니다.
그 내용은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이순자 여사 자서전에 기록된 전두환의 유언 입니다.
전두환의 유언
"잘 들어라.
세상이 지금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평생을 대통령 각하께 은혜를 입고 출세해온 자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은인을 살해했다."
"그런데도 잘못된 시류는 그런 배은망덕한 인간을 민주투사인양 호도하고 있다."
(김재규)
"이 아버지가 박 대통령 각하의 시해 사건을 수사하면서 무슨 생각을 가장 많이 했는지 아느냐?"
"각하께서 살아 계실 때는 그토록 총애를 다투던 사람들이 막상 각하가 저격을 당해 쓰러지시자 모두 도망쳐버렸다."
"각하를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화장실로 도망가버린 것이다"
(자치철)
"사람은 금수보다 나은 것은 은혜를 입은 분에게 은혜를 갚을 줄 알고,
옳은 일을 위해서는 설사 겁이 나더라도 용기를 갖고 행하려고 시도하는 그 신념 아니겠느냐?"
"하지만 대통령 각하의 시해 현장에는 비겁한 배신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건의 수사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 아버지도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수사 결과 강력한 용의자가 드러났다. (정승화)
그런데도 그 사람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어서 아버지가 시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려 하다가는 자칫하면 내 목숨과 명예, 아니 우리 모든 것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너희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만약 나까지도 내 목숨, 내 가족들에게 연연해 나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대통령 시해 현장의 그 비겁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묻겠다.
너희들은 내가 극도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해서 내 임무를 저버리고 국가가 내게 부여한 책임과 역사 앞에 불충을 저지러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는 이 역사적인 대사건의 수사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리 진상을 규명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이 임무는 절대로 가벼운 일이 아니다.
크게는 국민들과 역사에 대한 책임이고, 또 작게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오늘의 내가 있도록 보살펴주신 박 대통령에 대한 의리이고 신의이기도 한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로 이 아버지가 비겁하고 교활하게 사는 기회주의자가 되기를 원해서는 안된다.
설사 일이 잘못되고 그로 인해 너희들이 불행해지는 일이 있다고 해도 오늘밤 내가 한 이야기를 꼭 기억하고 용기를 갖고 살아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전두환은 정승화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고 박정희를 죽인 세력들이 권력을 침탈할 생각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정승화는 박정희·김재규 라인에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군인이었습니다.
수도권 주요 장성을 자신의 세력으로 임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대표적인 인물이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입니다.
정승화 장태완의 관계
박정희 사망 후 대통령이 공석이 된 1979년 11월 19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장태완에게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수경사령관은 부장급인 사람에게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당시 장태완은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직으로 차장직급에서 이례적으로 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박정희가 사망한 어수선한 상황이라면,
더욱 보수적인 인사 등용을 했어야 하는데 매우 급진적인 임명을 한 것은 수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태완은 취임축하 연회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하여 건배~"
일반적으로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지키는 막중한 직책이기 때문에 건배사를 할 때
"대통령을 위하여"
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대통령은 권한 대행 '최규하'겠죠.
그러나 그런 단어는 나오지 않았고 오로지 '정승화를 위하여' 라는 말만 합니다.
즉, 정승화와 장태완은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1212사태에서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탱크를 몰고 오는 극단적인 행동을 보인 것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진급 시켜준 '정승화'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온 행동일 가능성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12월 12일, 수경사 30경비단 장성 8인 모임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기 전에,
30경비단에서 초청 모임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모인 인물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전두환 초청, 수경사 30경비단 모임 장성
- 유학성 - 국방부 군수차관보
(정승화와 의형제 관계) - 차규헌 - 수도군단장
(구군부 출신) - 황영시 - 1군단장
(구군부 출신)
*위 3명은 전두환의 선배로 하나회가 아님.
전두환의 선배인,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위 3명은 김재규·정승화 라인에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에게 왜 정승화를 수사 안하냐며 강하게 질타를 했다고 합니다.
- 노태우 - 9사단장
- 박준병 - 20사단장
- 박희도 - 1공수여단장
(정병주 특전사령관 예하 부대) - 최세창 - 3공수여단장
(정병주 특전사령관 예하 부대) - 장기오 - 5공수여단장
(정병주 특전사령관 예하 부대)
*위 5명은 전두환의 후배 기수로 하나회 멤버.
그리고 하나회 멤버 5명은 정승화의 측근인 정병주, 장태완의 예하 부대였기 때문에 정승화 연행에 충돌이 나지 않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초청을 한 것이죠.
정병주 - 육군특수전사령관, 장태완 - 수도경비사령관 |
1,3,5 공수여단은 정병주 특전사령관 밑에 있는 부대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30경비단 모임은 하나회로 구성된 쿠데타 공모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회 멤버가 아닌, 박정희 군부 세력 멤버가 3명이 있었으며, 전두환이 30경비단에 초청을 한 진짜 이유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해야 하니까 장성들에게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죠.
정승화 연행을 알리지 않고 구속할 경우,
군부대 간에 내부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군사적 충돌이 나지 않도록 사전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였습니다.
30경비단에 모인 8인 장성들은 정승화가 구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조사도 안 받는 정승화가 문제가 있다고 인식 하였습니다.
수경사 30경비대대에서 모인 이유?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라면 '육군보안사령부'에서 장성들을 초청을 했어야 하는데 왜 보안사가 아닌, 수경사에서 모였을까요?
그 이유는 보안사는 여러 장성 군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쉽게 발각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경사 30경비대대, 보안사령부 위치 |
정승화 참모총장이 전두환의 구속 계획을 알았다면,
당연히 이를 막으려 할 테니까요.
그래서 장성급 군인들의 왕래가 적은 수경사 30경비대대에서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부대에서 모임을 작당 한다며 불같이 화를 냅니다.
조홍 대령, 장군 진급 축하 모임
12월 12일 전두환은 장성 8인과 정승화 체포에 대하여 양해를 구한 뒤,
곧바로 조홍 대령 헌병단장의 진급 축하 모임 행사로 참석하러 갑니다.
조홍 헌병단장 진급 축하 모임 참석자 |
그곳엔 조홍의 직속상관인 장태완·정병주·김진기 등 장성급 인물들이 한 곳에 모인 자리 였기 때문에 전두환은 그곳에 가서 장성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할 때 내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막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죠.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전두환이 장태완, 정병주를 부대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초청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잘못된 이야기 입니다.
실상은 전두환이 모임을 만들어서 초대를 한 것이 아니라,
진급 축하 자리에 장성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설득을 하러 간 것 입니다.
최규하의 관료주의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연행에 대하여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최규하는
"국방장관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국방장관한테 보고를 받을테니 국방장관을 데려오세요."
라고 대답합니다.
즉, 최규하는 보고 체계를 갖추어서 위로 보고하라는 식이었죠.
여기서부터 전두환의 계획이 완전히 꼬이게 됩니다.
당연히 긴박한 상황이니까 최규하 대통령도 정승화 체포에 대해서 흔쾌히 허락을 해줄 줄 알았는데 국방장관을 데려오라고 하니까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게 되죠.
앞에서 설명했듯이,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정승화 체포 계획을 보고 후
30분 뒤, 정승화를 연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이 당시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고 서로 간 연락이 쉽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오후 6시 30분,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의 체포 허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후 7시 5분, 계획대로 허삼수는 정승화를 체포하기 위해서 총장 공관으로 찾아갑니다.
결국 의도하지 않은 불법 체포 참극이 벌어진 것이죠.
정승화 체포 과정
허삼수, 우경윤 체포조는 정승화에게 조사를 받을 것을 이야기 했으나 정승화는 불같이 화를 내며 경호대를 부릅니다.그리고 총격전이 벌어졌죠.
우경윤 대령은 총격전에서 하반신에 총상을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됩니다.
참고로 우경윤은 정승화 총장 직속 기관이었으며, 전두환 합수부장에 파견 근무를 나가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중립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후 7시 40분,
정승화 총장은 서빙고 수사실로 연행됩니다.
연행되는 정승화 |
전두환은 총장이 체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곧바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럼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데려오라고 끝까지 우깁니다.12.12사태는 진짜 군사반란이었는가?
위의 사건 내용을 보았을 때,
12.12사태가 과연 쿠데타라는 생각이 들까요?
- 계획된 쿠데타 였다면 전두환은 진작에 가족들을 피신 시켰어야 함.
- 쿠데타였다면 대통령에게 정승화 체포에 대해 보고할 필요가 없었음.
- 일부 수사관, 헌병만으로 쿠데타을 일으켰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움
오히려 김재규, 정승화가 일으킨 군사반란을 진압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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